내가 (영)문학을 사랑하는 이유 - 왜 쓸모없는 전공이 필요한가
모든 학문이, 모든 배움이 실용적일 필요는 없다
딸에게 자기 전에 책을 읽어주는 이유
제 딸은 제가 대학원 4학년, 본격적으로 박사 논문을 쓰기 시작할 때 태어났어요. 그때부터 이제 초등학교 2학년인 지금까지, 제가 줄곧 해온 것이 있습니다. 그건 기회가 되는 대로, 아이가 자기 전에 침대 옆에서 책을 읽어주는 것이에요.1 딸이 어릴 때는 그냥 제가 읽고 싶은 책을 읽어 줬어요. 그때는 미국 정치학이나 통계학 책을 읽어줘도 잘 잤습니다. 딸이 나이가 들어서는 본인 취향과 선호가 분명합니다. 그래서 아이가 좋아하는 책을 읽어 줍니다. 요즘에는 프란세스 버넷의 『소공녀』, 『비밀의 화원』을 읽어주고 있습니다. 아이 스스로는 『윙스 오브 파이어』 (판타지) 시리즈를 반복해서 읽어요. 이 시리즈에 깊이 빠져서 요즘에는 설정집까지 탐독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어주는 이유는 독서가 지적 발달이나 대학 입시에 도움이 되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입니다. 저와 제 아이가 태어나고 자란 환경은 여러 면에서 많이 다릅니다. 적어도 한국과 미국의 거리만큼의 차이가 있겠죠. 그렇더라도 몇 가지만은 부모와 자녀 세대가 공유했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제게 그것은 책에 대한 사랑, 언어로 표현되는 구체적이면서도 보편적이고, 실질적이면서도 추상적인 세계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이 아이가 앞으로 떠날 삶의 여정의 출발점이 되었으면 합니다. 제게 그러했던 것처럼요.
비효율적인 학습 태도와 연구자의 길
저는 수재가 아닙니다. 중학교 때까지 성적은 반에서 앞에서 세는 것보다 뒤에서 세는 것이 훨씬 빨랐습니다. 고등학교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입시를 준비했고, 대학도 간신히 들어갔고, 대학원도 간신히 들어갔어요. 제가 이들 학교의 문을 닫았다고 믿습니다. 머리가 좋은 것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학습의 속도’라고 정의한다면, 저는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무엇을 배우든 저는 느리게 배웁니다. 저는 생각이 많고, 그 생각이 깊이 들어가고, 그것을 하나씩 정리해 가면서 앞으로 나갑니다. 나아가, 그 과정에서 부차적으로 호기심이 생기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또 바닥까지 가 봐야 합니다. 전혀 효율적인 학습 태도가 아닙니다.
그런 효율적이지 않은 학습 태도를 고수하고, 여기까지 온 이유를 생각해 보면 역설적으로 그 비효율적인 방식이 사실 ‘영원한 학생,’ 곧 ‘연구자’로 사는 데는 나쁘지 않은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연구는 기본적으로 탐색의 과정입니다. 헤매지 않고 되는 방향을 찾을 수 있으면 점집을 차리거나 주식 투자를 해야겠죠.
연구는 보통 되지 않는 방향을 제거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되는 방향이 그렇게 쉽게 보이면, 이미 다른 사람들이 그 길로 가지 않았겠어요? 좋은 연구자는, 그 맞지 않은 방향을 더 명확하게 정의해서, 더 빨리 제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연구 과정의 효율성은 높일 수 있으나, 그 길이 기본적으로 헤매는 길인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커리어를 최단 경로로 걷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연구자의 길은 맞지 않은 길입니다.2
비효율적인 삶을 살아와서 연구자의 길이 맞는 것처럼, 역설적으로 쓸모없는 전공을 선택해서 이 길이 그나마 덜 괴롭습니다. 대학에 진학할 때 전공에 대해 크게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고백하건대, 지독한 활자 중독입니다. 글자는 마침표와 쉼표까지 사랑합니다. 신병 훈련소에 갔을 때 가장 괴로운 것은 독서의 중단이었습니다. 읽을 수 있는 책이 없어서, 그나마 주어진 포켓용 신약성서를 반복해 읽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2012년 신혼여행 때 아내가 (몰래) 찍어준 사진입니다. 우리 부부는 미술을 좋아해서 연예할 때는 미술관에서 데이트를 많이 했습니다. 신혼여행은 당시 각자 다니던 회사에 장기 연차를 내고 유럽의 미술관을 다녀왔습니다. 여행 중간에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읽었습니다. 사진 속 책이 어떤 책인지도 기억합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입니다. 이 책에 대해서는 이 글의 끝에서 다시 언급합니다.
쓸모없는 전공의 쓸모
인생을 그렇게 효율적으로, 전략적으로 살지 않는 만큼, 대학 전공을 택할 때 많은 고민을 하지 않았습니다. 학부로 입학해 전공을 택할 때, 첫 전공으로 영어영문학을 택했는데, 영어학(언어학)과 영문학이 다른 학문인지, 어떻게 다른 학문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냥 책을 많이 읽고 싶어서, (한국어로는 이미 책을 많이 읽었으니) 외국어로 책을 많이 읽고 싶어서 그 전공을 택했습니다. 개인적인 흥미로, 영문학 외에도 중문학, 일문학 책도 많이 읽었고, 그래서 일어는 제2외국어로 공부를 했습니다. 중화권에 대한 호기심으로 홍콩, 대만으로 각각 1학기씩 교환학생을 갔고, 중국 대륙을 배낭여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만큼 문학을 많이 읽지는 않지만, 여전히 즐거움으로 연구와 동시에 그에 무관한 책을 읽고, 그 중에서도 영문학은 제 영원한 첫사랑입니다. 전공 수업 때문에 아니면 그냥 혼자 읽었던 영문학 도서의 내용을 지금까지도 대부분 기억할 만큼, 그 사랑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제 박사 논문은 미국정치발달(American political development)이라고 하는 미국 정치학과 역사학의 교집합에 있는 학문 분야를 다룹니다. 따라서 정치학 못지 않게 역사학 책도 많이 읽어야 했고, 무엇보다 미국 전역에 떨어져 있는 아카이브에 가서 직접 사료를 찾아 읽어야 했습니다. 논문쓰는 과정은 형사가 범인 추적하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이 아카이브들은 때로는 독립된 아카이브이기도 하고, 어떨 때는 대학에 부속돼 있기도 하고, 어떨 때는 시나 카운티 정부에 부속돼 있기도 합니다. 규모가 어느 정도 되면 사서가 있고, 그렇지 않으면 사서가 없습니다. 그 아카이브에 간다고 내가 찾고자 할 자료가 있을지는 모릅니다. 이건 웹사이트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 데이터가 아닙니다. 데이터가 되기 이전의 자료입니다. 아카이브의 박스에 누군가 남겨놓은 자료들이 가득히 쌓여있고, 그런 박스들이 이삿짐처럼 열을 지어 쌓여 있습니다. 그런 걸 읽는 일은 누군가에게는 괴로움일 수 있으나, 저 같은 사람에게는 기쁨입니다. 쓸모없는 전공을 택해서 읽는 즐거움을 체화하지 않았다면, 그 지적 습관을 연구 능력으로 재활용하지 못했다면, 그 길은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일반 교양이 왜 ‘학문의 기초’이고 ‘대학의 근본’인가
이공계 분들은 가끔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구분을 못합니다. 둘은 다르고, 이 둘을 구분 못하면 인문학자와 사회과학자 모두 기분 나빠합니다. 사회과학은, 분야를 막론하고, ‘과학’이 되고 싶어 합니다. 사회과학에서 ‘이론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근본적으로 그 학문이 생각하는 ‘과학이란 무엇인가’란 질문과 맞닿아 있습니다. 인문학은 과학일 필요가 없는 학문입니다. 과학과 다른 눈으로 세상을, 인간을 보는 학문이고, 그래서 가치가 있는 학문이니까요.
인문학에서 출발해 사회과학으로 넘어왔습니다. 다시 데이터 과학으로 영역을 확장했고, 지금은 정치학 박사로서 정책학과 교수로 가르칩니다. 교수는 한국과 미국에서 두 번 했고, 그 중간에는 미국 공공 영역에서 데이터 과학자로 일했습니다. 관련 행정 수속이 끝나면 같은 대학의 데이터 과학부에도 겸임으로 소속될 예정입니다. 전 쓸모없는 전공인 인문학에서 출발한 것이 제 이상한, 복잡한, 혹은 자유롭게 발전해 온 커리어의 비결(祕訣), 혹은 ‘나만의 무기’라 믿습니다.
영문학에서 제 이후의 커리어에서 직접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도구를 배운 것은 사실 없습니다.
여기서 배운 것은 비효율적으로 사는 삶의 태도입니다. 즉각적인 효용성은 보이지 않는 것도, 그 배우는 과정 자체를 즐기면서 배우는 태도를 배웠습니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물을 파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살아서 효율적이지는 않았으나, 효과적이었던 것이 많습니다. 달리기와 마찬가지로 학문에 있어서도 꾸준한 노력이 중요합니다. 전문성은 단기 노력의 성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장거리를 뛸 수 있는 심장을 제게 준 것은 영문학입니다.
밤마다 딸에게 책을 읽어 줍니다. 제 딸이 어떤 커리어를 추구하기 이전에, 책을, 글을, 지식을 사랑하기 희망합니다.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지, 좋은 것인지 이해하길 소망합니다. 살다 보면 먹고 살기 위한 기술도 배워야 합니다. 그것도 당연히 중요합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 수 없으나, 빵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그러나 모든 학문이, 모든 배움이 실용적일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인간 삶의 가치는 경제적 가치, 효율성만으로 제약되지 않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제가 십 수년 전에 읽은 19세기 영국 소설과 20세기 미국 시를 지금도 기억하는 이유는 거기에서 그 이후의 학문에서는 내가 배우지 못했고, 다루지 못했던 수많은 개인적, 사회적 주제를 고민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근본적인 사고를 문학에서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죠. 우리는 보통 인문학을 문사철(문학, 역사 철학)로 정리합니다. 유럽과 미국식으로는 문학, 역사, 철학뿐 아니라 전문대학원에서 다루지 않는 순수학문은 모두 일반 교양(liberal arts)이라 설명합니다. 여기서 liberal은 사실 일반보다는 자유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제약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라틴어 어원은 liberalis입니다. 이 말은 “자유로운” 혹은 “자유로운 사람의”란 뜻입니다.
일반 교양에는 수학도 포함됩니다. 전 수학자 프랜시스 수 교수가 쓴 『인간성의 고양을 위한 수학』 (Mathematics for Human Flourishing)이란 책을 좋아합니다. “수학[일반 교양]은 어떤 쓸모가 있느냐”라는 질문에 이 책은 그 질문 자체가 틀렸다고 말합니다. 수학은 오히려 그런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는 학문이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수학은, 일반 교양은 사람을, 더 사람답게 만들어 줍니다. 내 삶의 가치를 스스로 점검하고, 그것을 어떻게 실현할지 고민하게 합니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기술, 도구, 인맥을 찾는 것은 이후의 여정의 몫이죠. 그러나 그 출발점은 여기에서 만들어집니다. 그 점에서 일반 교양은 중요합니다. 일반 교양은 자유롭게 사는 삶의 기초입니다.
대학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곳입니다. 현대 대학은 전공이 많습니다. 현장에서 바로 쓸 수 있는 지식을 강조하는 학문들이 있습니다. 제가 가르치는 정책학을 포함해, 문과로는 법학, 경영학, 이과로는 치의학, 약학 등 소위 전문대학원에서 가르치는 전문적 지식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그러나 대학 교육의 근본은 이렇게 당장 쓸모가 알기 어려운 일반 교양이라 믿습니다. 대학에서 문리대(College of Arts and Sciences)에 소속된 대부분의 전공은 모두 이러한 일반 교양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학 교육의 근본인 학부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이 일반 교양입니다. 부실한 기초로는 높은 전문성을 쌓을 수 없습니다. 제가 소속한 UNC 채플힐에서는 대부분 신입생은 문리대에서 출발해 지적 기초를 쌓고 이후 세부 전공을 선택하도록 커리큘럼이 짜여져 있습니다. 이런 구조를 갖고 있는 대학들이 유럽과 미국에 많은 것은 위와 같은 철학적 배경, 역사적, 현실적 이유 때문입니다.
허버트 사이먼은 현대 사회과학뿐 아니라 인공지능의 초기 연구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사이먼은 시카고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노벨경제학상과 컴퓨터 과학계의 노벨인 튜링상을 받은 유일무이한 인물입니다. 사이먼의 대부분의 커리어는 카네기멜론대(CMU)에서 이뤄졌습니다. 일반 교양의 기초(수학과 논리학)를 토대로 다수의 새로운 응용 분야의 과학적 기초를 쌓은 인물로서, 사이먼은 대학교육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습니다.
산업경영대학원(Graduate School of Industrial Administration)[오늘날 CMU의 테퍼 경영대학원]을 설립한 이들은 대학 교육의 목표에는 지식을 순수하게 탐구하는 일과 지식을 실제 현장에 적용하는 일이 모두 포함된다고 보았다. 그들은 물리학이나 역사에 대한 지식이 무용하다고 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마찬가지로, 재고 관리나 조직 구조에 대한 지식 역시 지적, 미적 도전을 준다고 믿었다. 그들은 [경영대와 같은] 전문대학원에서는 유용함만이 중요한 기준이고, 학술 분야에서는 비실용성[혹은 순수성]만이 유일한 가치라는 생각을 양쪽 교육 모두에 폐악인 해로운 교리라고 여겼다.
교육은 지적 도전과 흥분 없이 만족스럽게 이루어질 수 없다. 전문대학원은 교육과 연구 모두에 있어 활력이 있어야 한다. 전문적 훈련 못지않게 학문적 훈련에 있어서도 탄탄한 지적 기초를 제공해야 한다.
— 허버트 사이먼, 『행정행태론』(4판)
제 지적 여정이 영문학에서 출발했던 만큼, 저 역시 제 학부와 대학원 교육, 학생 지도에 있어서도 일반 교양적인 접근법, 현장에서의 문제해결력을 동시에 강조합니다 (강의안 예시). 우리가 대학에서 (즉시) 쓸모없는 학문을 가르치고, 그것이 대학 교육의 중심인 이유는 이러한 학문들이 인간성과 지적 발달(human flourishing)의 훌륭한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그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삶을 살기 위해 자유로운 지적 발달이 중요하다는 점을 누구보다 명확하게 이해한 사람은 존 스튜어트 밀입니다. 이 주제에 대한 그의 생각이 잘 정리된 책이 『자유론』입니다. 이 책은 제가 신혼여행 때 비행기 안과 공항에서 읽고 있던 책이죠.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다시 읽고, 또 읽는 책이기도 합니다.
다음 글은 제 홈페이지 강의 섹션에도 언급되어 있는 밀의 인용문입니다. .
“인간의 본성은 설계도에 따라 정해진 기능만 수행하도록 설계된 기계와 다르다. 인간의 본성은 인간으로 만드는 내적 동력에 따라서 스스로 온갖 방향으로 자라고 크는 나무와 같다.”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1859), 제3장
딸 이름도 제가 좋아하는 영문학 작가 이름을 따서 지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격과 기질상, 이런 불확실성이 견디기 어려운 분들에게 박사 과정은 근본적으로 추천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이 과정이 괴로운 것 이상으로 즐거워야겠죠.



교수님 안녕하세요. 멋진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있는데 배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겨 댓글을 남기게 되었는데요. 교수님께서 혹은 자녀분께서 책을 고를 때의 기준 같은 게 있으신지요? 아니면 흥미 또는 취향 위주로 아무런 책을 고르시는 지 궁금합니다.
어렸을 적 해리포터에 빠져서 책을 반복해서 읽었는데요. 부모님께서 당시 소설 책 읽는 걸 별로 안 좋아하셔서 결국 강제로 중단 당했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모든 책은 저자만의 세상과 사고를 펼치기에 그 자체로 귀중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떤 책은 굳이 읽을 필요가 없겠다는 오만한 생각도 들더라고요.
해당 맥락에서 교수님께서도 책을 고르는 기준 같은 것이 있으실지, 혹은 자녀 분께서 책을 읽을 때 책을 선택하는 기준에 대한 지도도 어느 정도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질문이 길어졌네요. 다시 한 번 좋은 글 감사드리며, 건강하시고, 즐거운 일 가득하세요!